사운드 디자인의 비밀 [1]
<스타워즈> 세계의 소리를 창조해낸 사운드 디자이너 벤 버트는 자신이 광선검의 밑그림을 본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광선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과장을 포함했겠지만, 소리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소리가 단순히 듣는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쥬라기 공원>의 공룡 발소리, <킹콩>의 울음소리 등 우리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지금까지 없던 비주얼에 대한 새로운 사운드들뿐만 아니라 영화 사운드는 매일같이 들리는 물소리와 사람들의 소리까지도 새롭게
만들어낸다.
영화 사운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막연히 그것이 마술인 것처럼 접근하기보다 실질적인 작업 과정에 동참하는 편이 답을 찾기
쉬울 것 같다. 영화 사운드는 프로덕션 사운드, 즉 현장녹음에서부터 만들어지지만 이번에는 후반작업 과정에 관한 이야기만 담는다.
현재 사운드 후반작업 중인 곽경택 감독의 신작 <태풍>과 윤종찬 감독의 <청연> 현장을 여러 날 걸쳐
방문하고 접한 모습을 담았다. 충무로의 사운드 후반작업 분야의 주요 스탭 9명을 소개하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한국영화의
디지털사운드 베스트 10편을 함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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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남양주종합촬영소에 근무하는 영진위 녹음실 직원 2명이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들
짐가방 안에는 붐마이크와 헤드폰, 레코딩 믹서 등 녹음 장비가 들어 있었고, 같은 비행기 안에 윤종찬 감독도 타고 있었다.
이들은 영화 <청연>에 쓰일 비행기 소리를 녹음하러 가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여류 비행사 박경원이 탔다는 1930년형
Steerman 기종의 복엽기 소리 딱 하나를 녹음하러, 바다를 건너는 길이었다. 이 미국행은 영진위 녹음실 믹싱 엔지니어와
사운드 에디터들이 한국 안에서 해볼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본 다음 택한 최후의 방편이었다. 미국산 사운드 라이브러리에서
1천여종 소스를 뒤져 사운드를 만들어봤고, 일본에 수소문해 30년대 복엽기 사운드를 찾아내기도 했다. 미국산 라이브러리 소스로는
나무 재질의 복엽기 사운드를 디자인할 수 없었고, 일본에서 구한 복엽기 사운드는 60년대에 녹음된 거라 음질이 좋지 않았다.
토평의 경비행기장에도 직접 녹음하러 갔었지만 복엽기의 우렁찬 소리를 얻지 못했다. “이게 아닌데, 이 소리가 아닌데”라고, 매번
고개를 가로젓기만 한 윤종찬 감독은 1년 전 미국 촬영 당시 협곡 사이를 가르며 날아가는 복엽기의 “귀청을 찢어놓을 듯한
사운드”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감독은 그 소리가 박경원의 삶을 대변하는 생명력 있고 강렬하고 역동적인
<청연>의 비행기 사운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곧 <청연>의 소리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
소리를 가만히 앉아서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복엽기 사운드 녹음에 참여하기로 계약을 맺은 미국 현지 스탭들은, 아시아 모 국가의 영화 스탭들이 비행기 소리를 녹음하러
미국까지 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녹음은 촬영 중에 했어야 하고, 그게 안 됐다면 라이브러리에서 소스를 찾아 작업해도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청연> 팀은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 그대로 사막과 협곡에서
복엽기 소리를 녹음하기를 원했고 지상 100m 이하의 저공비행 사운드를 원했으며 마이크 위치까지 원하는 곳을 정해놓은 상태였다.
학을 떼면서 작업을 진행하던 현지 스탭들도 막상 녹음 작업에 들어가자, 비행기가 워낙 빠르고 순간적으로 마이크 앞을 지나가는
탓에 지상에서 1∼2초밖에 소리를 잡아낼 수 없는 것에 답답해했다. 결국 지상 50m까지 저공비행을 감수하며 더 많은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만족스럽게 녹음을 마친 스탭들은 양수리 스튜디오로 돌아와 복엽기 사운드 디자인 재작업에 착수했다. 완성된
소리를 듣고, 윤종찬 감독도 비로소 고개를 세로로 끄덕였다.
좋은 부분만 잘라 이어붙일 수 있다
스크린 밖으로 울려나오는 모든 소리는 영화 안의 바로 그 사물 또는 그 인물이 바로 그
장소에서 내는 소리일 때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사운드 후반작업 현장 관계자들은 똑같이 이야기한다. 인물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폴리 사운드, 어떤 공간 안의 소음을 의미하는 앰비언스 사운드, <청연>의 복엽기 사운드처럼 특수효과 디자인이
요구되는 이펙트 사운드 등 모든 영화 사운드의 소스 작업에서는 사실감과 설득력이 가장 중요하다. 이 사실감과 설득력은 대단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작업장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기에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장면들의 연속이 말해준다.
<태풍>의 사운드 소스 작업이 한창인 녹음실 라이브톤의 폴리룸 안. 이동환 폴리 레코딩 엔지니어와 이창호 폴리
아티스트가 커다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헤드폰과 마이크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물컵 내려놓는 거 하나 갈게요.” “버튼
누르는 거 하나 갈까요?” 폴리 아티스트는 사람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폴리룸을 들락거리기도 수시다.
물컵에 물 담으러, 담뱃불 붙일 성냥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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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U 영화과 출신인 이동환씨는 <파이트 클럽>과 <쎄븐>의 사운드 디자인을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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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티스트 이창호씨. <내남자의 로맨스>에서 마른 새우를 비벼 바퀴벌레 기어가는 소리를 만든 것이 뿌듯한 기억 중 하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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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레코딩 엔지니어는 폴리 아티스트가 만든 소리를 컴퓨터와 믹서로 그 자리에서 가다듬는다. 둘의 관계는 현장 편집기로
촬영 분량을 편집, 장면을 확인하는 감독-배우의 관계와 비슷하다. 차이라면 배우의 연기는 OK컷과 NG컷에서 각각 좋은 부분만
잘라 이어붙일 수 없지만, 소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타이 공항에서 쫓기는 몸이 된 세종(이정재)이 눈앞의 경찰들을
하나씩 밀어내는 10여초 분량의 액션컷 폴리를 여러 테이크 가더니 이동환씨가 말한다. “뒷부분 소리는 이번 테이크가 더 좋은데,
앞부분은 아까 두 번째 거랑 세 번째 소리가 좋은 거 같네요. 제가 알아서 편집할게요.” 리얼리티를 위해 편집되는 사운드가
갑자기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소스를 찾아 로케이션을 떠나기도
폴리팀은 녹음실 밖을 벗어나 로케이션 폴리 작업을 떠나기도 한다. <태풍>의
클라이맥스 시퀀스로 씬(장동건)과 세종의 결투장면은 배라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폴리룸 안에서는 최적의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세종과 씬의 발자국 소리를 따기 위해 최용오 폴리 레코딩 엔지니어와 박준오(전 웨이브랩 실장과 동명이인) 폴리
아티스트가 서해안 함상공원을 찾았다. 밤 10시. 1940년대에 만들어진 구축함 내부 사관실에 레코딩 장비를 세팅하고, 배
안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에 가까운 사운드를 내줄 만한 장소를 찾아 포탑 안에 마이크와 모니터를 설치한다.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추운 포탑 안에 들어선 박준오씨가 세종의 발걸음에 맞춰 발을 구른다. 선실 안에서는 최용오씨가 두 손가락을 이용해
세종의 발걸음이 몇 발짝인지 세어보고 있다. 싱크가 계속 어긋난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로케이션 폴리를 성공적으로 하려면 조용한
밤밖에 작업할 시간이 없다. 세상의 소리들이 잠든 시간에 소리를 채집하러 나온 두 사람은 배 곳곳을 옮겨다니며 여러 소리를
딴다. 동이 튼다. 또 어느새 9시가 된다. 두 사람은 집으로 귀가할 시간이고, <태풍>의 사운드 이펙트 에디터
조예진씨는 곧 출근할 시간이다. 최용오-박준오 팀이 작업한 것과 동일한 신에 필요한 이펙트 소스를 라이브러리 업체로부터 받아
이펙트 디자인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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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오씨는 영진위 녹음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밤새 작업하고도 피곤한 기색없이 녹음실 후배 박준오씨를 데리고 계속 소리를 따러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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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혜명
<tuna@cine21.com>(블로그:
http://blog.cine21.com/tuna1747)
사진: 서지형